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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발전 속도와 인간의 적응, 악마의 디테일, 우리의 미래)

by DG 2026. 8. 12.

1. 발전 속도와 인간의 적응

오랜 시간 IT, CAD, 설계 업계라는 치열한 터전에서 함께 구르고 고민해 온 친구들과 오랜만에 저녁 자리를 가졌습니다. 동종 업계에서 뼈가 굵을 대로 굵어진 베테랑들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요즘 현장에서 체감하는 가파른 변화와 씁쓸한 업계 분위기로 흘러갔습니다.

 

모두가 공통으로 입을 모아 이야기한 것은, 최근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이미 인간이 적응하고 학습할 수 있는 한계치를 뛰어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가속도 속에서 정작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입지와 자리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냉정한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프로그램 개발 및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파도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최근 다양한 AI 도구와 생성형 플랫폼이 현장에 급격히 도입되면서,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과거라면 초급 개발자나 엔지니어 여럿이 며칠 밤을 새워가며 하나씩 코딩하고 테스트해야 했던 단위 업무를, 이제는 AI를 도구 삼아 단시간에 완성도 높은 출력물로 뽑아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장의 진짜 비극과 난제는 그 이후에 발생합니다. AI 덕분에 초기 결과물은 버튼 몇 번으로 쉽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그 출력물이 지닌 미세한 오류나 예외 상황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검증하며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고급 엔지니어'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졌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과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몸으로 부딪치며 시스템의 뼈대를 함께 구축했던 베테랑 동료들이 지난 구조조정의 파도를 거치며 이미 다른 산업 분야나 자영업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화려해지고 고도화되는데, 정작 이를 밑에서 단단하게 받쳐줄 핵심 인재들은 현장을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습니다. 기술의 눈부신 진보와 현장 인적 자원의 고갈이 만들어낸 씁쓸한 현실의 아이러니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뛰어난 AI 기술이 도입된다 한들, 결국 현장에서 시스템의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본질은 '도메인 지식(Domain Knowledge)'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메인 지식이란 단순히 텍스트 형태의 매뉴얼에 적힌 이론이나 정형화된 데이터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프로젝트의 실패와 성공이라는 궤적 속에서 축적된 '글이나 말로는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암묵지와 현장 경험치'이며, 나아가 실제 시스템을 매일 사용하는 현장 설계자 및 엔지니어들의 고충과 동선을 깊이 이해하고 대응해 주는 살아있는 노하우를 뜻합니다.

2.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많은 기업들이 이러한 베테랑의 노하우를 시스템이라는 틀 안에 완전하게 담아내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비용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의 바닥 경험이 결여된 채 만들어진 시스템은 결국 겉모습만 화려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최첨단 AI를 접목한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현장의 미시적인 프로세스와 실제 사용자의 예외적인 시각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외면 받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미 요란한 찬사 속에 등장했다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많은 시스템들을 목격해 왔습니다. 현장의 진짜 전문가가 몇 가지 날카로운 질문만 던져도 바로 밑천이 드러나 버리는, 알맹이 없는 시스템들 말입니다. 문제는 이 귀중한 도메인 지식이 결코 하루아침에, 혹은 단기 교육만으로 쌓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명의 엔지니어가 온전한 전문가이자 통찰을 갖춘 리더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기업과 사회가 그의 실패를 자산으로 인정해 주고 충분한 경험치를 쌓을 수 있도록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여전히 냉정하기만 합니다. 프로젝트 리드는 당장의 마감 시간에 쫓겨 겨우 80점짜리 완성도의 시스템을 세상에 내놓기 급급하고, 오픈 이후 터져 나오는 수많은 문제점과 오류를 임기응변식 땜빵으로 메우는 악순환을 매번 반복합니다. 실패를 미래의 소중한 자산으로 인정하고 축적하지 못하는 경직된 조직 문화가, 결국 도메인 지식의 단절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객과 시장의 요구사항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높아만 가지만, 이를 온전히 감당하고 끌고 갈 현장의 진정한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 구조적 심각성과 위험성을 깊이 통찰하고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이가 많지 않다는 점이 마음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곤 합니다. 하지만 거대하게 밀려오는 시대의 변화 흐름 앞에서 그저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비관적인 불평은 그저 나 자신의 소중한 에너지를 갉아먹는 독이 될 뿐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시대가 거스를 수 없이 변했음을 담담히 인정하고,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짚어 나가며 스스로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3. 우리의 미래의 모습

머지않은 미래에는 AI가 생성한 초안과 결과물을 또 다른 AI가 평가하고 검증하는, 과거 SF 영화나 상상 속에서나 보던 풍경이 완벽한 일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우리 세대는 현장에서 직접 구르고 깨지고 부딪치며 쌓아 올린 단단한 도메인 지식과 뼈아픈 경험치가 있기에, 이 거센 격변의 파도를 온몸으로 버텨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득 마음 한구석을 깊게 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아이들 세대입니다. 아이들이 자라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고 자신의 몫을 해내야 할 때쯤이면, 세상은 지금의 잣대나 예측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부모로서 미래를 바라볼 때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고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인가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이 소망해 봅니다. 그 막연하고 거친 미래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기술에 휘둘리거나 AI라는 도구에 쉽게 대체되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단단하게 구축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쉽게 얻은 지식이 아닌, 직접 경험하고 고민하며 얻은 진짜 지식의 무게를 아는 사람으로 곧게 성장해 주기를 마음 깊이 기도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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